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카이로 회담 (문단 편집) == 영향 == >상기 3대 강국은 한국 인민의 노예 상태를 유념해 '''적절한 시기'''에 한국이 자유와 독립 상태가 될 것을 결의한다. >---- >The aforesaid three great powers, mindful of the enslavement of the people of Korea, are determined that '''in due course''' Korea shall become free and independent [[중화민국]]의 연합국 4대 강국으로의 지위가 확정되었으며, 전후 일본 제국의 해체와 무엇보다도 '''한국의 독립'''이 처음으로 언급된 것이 한국에겐 큰 의의가 있다고 하겠다.[* 그리고 이는 '한국은 자력으로 독립을 쟁취한 것이 아니다'라는 일본 우익의 주장을 반박하는 근거 중 하나가 되기도 한다. 카이로 회담 선언 중 유일하게 한국에 대해서만 독립시킬 것을 천명하고 있는데다, 한국이 식민 지배에 저항도 하지않고 독립을 호소하지도 않는데 열강이 특별히 '한국'의 독립을 약속할 리가 없기 때문.][* 사실 '''[[내로남불|스스로 독립을 쟁취하지 못한 건 일본이다.]]''' 일본은 패전 후 [[샌프란시스코 조약]]으로 주권을 되찾기 전까지 저항다운 저항 행위가 전무했다. ~~핵을 두방이나 맞고 천황이 옥음방송으로 백기를 든 상황에서 무슨 저항을 더 하겠냐만은~~] 그러나 [[이승만]]은 카이로 선언에서의 이 「적절한 시기」 문구에 대해 영미국의 친소적인 노선으로 인해 한국 [[대한민국 임시정부|임시정부]]를 바로 승인하여 즉각적인 독립이 이루어지지 못하고 결국 [[소련]]이 대일 전쟁에 참가하게 됨에 따라 [[삼팔선]]으로 분단되었다고 비판하였다. 아래는 1945년 샌프란시스코 [[국제연합]] 창립총회에 이승만이 보낸 성명이다. >나는 [[이오시프 스탈린|조셉 스탈린]]이 실제 참석하지 않았더라도 카이로 회담에서 보이지 않는 그의 힘이 작용하고 있었던 일을 알고 있습니다. 태평양 방면에 대한 소련의 야망은 전면적인 고려를 받고 있습니다. 나는 또한 영국이 동양에 있어서의 권익과 현상유지를 위하여 최고의 노력을 하고 있음을 알고 있으며 1941년의 버마 로드(Burma Road) 폐쇄[* 중국의 생존을 위한 장개석 총통의 투쟁이 중대한 시기에 이르렀을 때, 이 사건으로 말미암아 절대적으로 필요한 군수물자 보급이 크게 두절되었다.]를 인도한 영국의 편의주의와 타협 정신이 극동 아시아에 관해서도 같은 가혹한 정책을 취하게 하는 것이나 아닌지 걱정되는 바입니다.[br][br]나는 미국 국무성의 문이 나의 임시정부 승인의 호소에 대하여 카이로 회담 이전과 같이 굳게 닫혀 있음을 알고 있습니다. 우리 나라가 [[유엔]]의 회원 국가가 되고 무기대여법이 적용될 가치가 있는 동맹 국가로서 인정받기 위하여 반복된 시도는 조금도 주목되지 않았습니다. '''우리의 문제를 차후 결정에 맡기기 위하여 카이로 회담이 고의로 애매한 표현을 사용한 것과 이 애매한 표현의 주요 이유가 아시아에서 소련의 입장이 결정되지 않았던 때문인 것도 명백합니다.'''[br][br]나는 아시아에 관하여서는 물론 유럽에 대해서도 그 국제 관계를 오랫동안 연구하여 왔습니다. 나의 유럽 여행은 [[유럽]]에서 발생한 사건이 의미하는 바에 대한 이해를 강하게 하였습니다. 동남부 유럽에서 활동하고 있는 게릴라는 명백히 공산 계열과 비공산 계열로 나누어져 있습니다. [[프랭클린 루즈벨트|루즈벨트]] 대통령과 [[윈스턴 처칠|처칠]] 수상이 유럽 대륙에 대한 상륙 작전을 세울 때에 '''발칸 반도를 경유하지 않기로 합의한 것은 동 지역을 소련 세력에 맡기기로 합의한 것을 뚜렷이 나타내는 것입니다.'''[br][br][[그리스]]를 원조하려는 영국의 필사적 노력은 이와같은 한정된 정책에 의한 것으로서 그리스 안에 친영 정부를 유지하고 지중해의 생명선을 확보하려는 영국의 다급한 필요성을 확실하게 의미하고 있습니다.[* 결국 후에 영미와 소련이 그리스에서 충돌하여 [[그리스 내전]]이 발발하게 되고 이로인해 [[트루먼 독트린]]이 1947년 초에 발표되는 원인이 되었다.] 그러나 그 지역이나 그 외의 지역에 있어서 발생한 공산당 문제를 토의할 수는 없었으므로 ㅡ 소련의 감정을 해치지 않기 위하여 ㅡ 동남부 유럽 안전에 관한 정책을 세우는 것은 저해되었던 것입니다. 북유럽에 있어서 [[핀란드]]는 자기 나라의 독립을 유지하기 위하여 노력한 결과 [[독일]]과 협력하여 소련과 싸웠으므로 그 나라의 입장만을 불리하게 하였습니다. 그리고 [[폴란드]]에서는 소련의 동부 폴란드 점령이 공산주의 확대 계획을 유리하게 하였습니다.[br][br]유럽에서 서서히 전개되고 있던 사태가 [[중국]]에서는 훨씬 공공연히 또한 현저하게 나타났습니다. [[연합국]]은 중국의 국민정부가 공산주의자 ㅡ 정부에 대하여 공공연한 반감을 품으며 독립된 군대와 조직을 가지고 있는 ㅡ 에 대하여 [[좌우합작|대립적 행동을 중지하고 타협하에 제휴할 것]]을 주장하였습니다. 루스벨트 대통령이 결정한 [[추축국]]의 무조건 항복 정책은 명백히 소련의 제국주의적 행동에 대한 연합국의 묵인 정책과 병행하고 있었던 것입니다.[br][br]전쟁이 종말에 가까와졌을 때, 나는 한국 임시정부의 승인만이 소련의 한국 약탈을 막을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라고 주장하였습니다. 한국 임시정부는 너무나 오랫동안 한국을 떠나 있었으므로 한국 민족을 대표할 수 없었습니다. 종전 후 우리가 [[대한민국 정부|신 정부]]를 수립하기 위하여 [[총선거]]를 실시할 수가 있을 때까지 기다리는 것이 좋다는 의견에 대하여 우리는 한국이 해방됨과 동시에 즉시로 [[5.10 총선거|연합국 감시 밑에서 총선거]]를 실시한다는 양해하에만 가승인되는 것이라고 답하였습니다.[br][br]이와같은 견해는 국무성과의 회담이나 신문 기자와의 회견 석상에서 또한 방송이나 잡지를 통하여 그리고 나와 친우들에 의하여 반복되었습니다. 그러나 정부 고위 당국이 이 견해를 고려하고 있는 기색이 없자 나는 부득이 루즈벨트 대통령과 처칠 수상은 한국이 형식적으로 정부를 가진다해도 사실상에 있어서는 '''소련의 지배하에 둘 것이라고 결정했다는 결론'''에 도달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손세일, 《이승만과 김구》, 2015, 조선뉴스프레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